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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만 살펴도 즐거운 북촌의 동쪽 골목길



이곳 북촌은 우리나라 신교육의 산실입니다.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 여고 셋, 남고 넷, 초등학교까지 아홉 학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북촌 일대에는 서편의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동편에 중앙고등학교와 대동세무고등학교가 남아 있습니다. 경기고등학교는 이사하고 그 자리에 정독도서관이 들어서 있고 창덕여고 자리에는 헌법재판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휘문학교가 있던 곳에는 대기업의 사옥이 들어섰습니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운현궁 아래쪽엔 1984년 왕실학교로 시작된 교동초등학교가 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어딜 가나 가장 잘 지어진 건물은 대부분 학교였는데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재동초등학교를 돌아서면서 특별해 보이는 한옥들이 하나씩 나타납니다. 골목길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대문은 묵직하면서도 말끔합니다. 나타나는 한옥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서편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집들보다는 조금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똑같아 보이면서도 조금씩 다른 대문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문 위쪽에 붙여 놓은 집의 이름이 간호 눈에 띕니다. 정촌학당, 청록재, 락고재, 청원산방, 공일당...현판마다 글씨체와 모양이 다 다릅니다.






이곳엔 한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 더러 있습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안락함이 있는 한옥에서의 하룻밤이 오래 기억될 듯합니다.


기품 있는 예서체의 현판만 보아서는 단순히 규모가 좀 큰 한옥이라 생각했습니다. 담은 진흙과 얇은 돌 판을 켜켜이 쌓아 올려 은은한 멋을 풍기고 있었고 대문은 세월의 무게를 입고 묵직하게 닫혀 있었습니다. 4개의 객실을 운영하는 이 게스트하우스의 대문과 벽을 살피다 문득 보니 이곳이 ‘진단학회 창립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이 일인학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에 의한 추사 김정희 연구입니다. 후지쓰카 교수는 추사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세한도를 포함해 추사가 남긴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1934년 의식 있는 학자들이 모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조직한 학술단체가 진단학회였습니다. 진단학회는 8년 후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핵심 회원들이 투옥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해방 이후 활동을 재개해 현재는 500여명의 회원들이 학술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진단학회터를 뒤로 하고 걷다가 추사의 대련 글씨가 새겨진 현판을 만났습니다.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書藝如孤松一枝(서예여고송일지), 그림 그리는 법은 긴 강이 만리에 뻗친 듯하고 글 쓰는 기법은 외로운 소나무한 가지와 같다.‘ 그림과 글씨에 대한 추사의 생각을 담고 있는 이 글씨의 원본 족자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파선생구거(圓坡先生舊居)와 인촌선생고거(仁村先生故居)의 대문은 얼핏 똑같은 집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비슷합니다. 원파 김기중은 인촌 김성수의 백부이자 양부다. 원파는 1909년 부안군 줄포에 현 줄포초등학교의 전신인 영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후에 현재의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인 중앙고보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 인수에도 관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촌 김성수는 중앙고보와 보성전문 외에 동아일보, 경성방직, 해동은행 등을 경영하며 일제강점기 교육, 언론, 기업과 은행 등을 경영했고 해방 후에는 제2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큰 대문은 큰 대로, 작은 대문은 작은 대로 개성과 멋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문에 걸려 있는 당호의 글씨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서예가들의 작품부터 이름 없는 촌부가 꾸밈도 멋도 부리지 않고 쓴 듯한 글씨까지 다양했지만 나름의 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대문은 화려하고 웅장합니다.  어떤 문은 소박하고 고졸하며 따뜻합니다. 때로는 함부로 다가서기 꺼려지는 위엄을 갖춘 문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말끔하게 단장된 한옥 대문 앞의 화강암 계단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봄날 마치 흰 나비가 팔랑이며 날 듯, 그러나 지나치게 도드라지지 않게 새겨진 글귀를 보고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단순히 생각하면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하니 이 집 주인의 ‘좋은 날’은 누가 나를 위해 마련해주는 그런 ‘좋은 날’이 아닙니다. 출근 했다가, 또는, 출타했다가 집에 돌아와 계단을 오르기 전 눈에 띄도록 계단의 세로 면에 ‘日日是好日’을 새겼습니다. 오늘도 ‘좋은 일’ 해서 ‘좋은 날’ 만들었는가. 주인은 집에 들어가며 스스로 그것을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는 이에게 넌지시 말합니다. 오늘 하루 좋은 날로 만들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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